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사의의 난 (문단 편집) == 진정한 흑막은 이성계 == 하지만 현대의 연구가들은 이 난리에서 [[조사의]]의 비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황으로 볼 때, 이 난은 '''[[태조(조선)|이성계]] 본인이 일으킨 난'''이라는 견해이다. 우선 [[신덕왕후]] 강씨는 본가나 외가나 동북면 [[함흥부|함흥]]과는 상관이 없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곡산 강씨([[황해도]] [[곡산군]]), 외가는 진주 강씨([[경상남도]] [[진주시]])다.] 동북면 출신인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연줄을 만들기 위해 혼인한 것이니 동북면에 기반이 있는 집안 출신은 필요도 없고. 당연히 강씨의 친척 강현[* 신덕왕후의 [[사촌]]이다.]이나 인척 조사의도[* 할아버지 [[조변]]이 상장군까지 지냈을 만큼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조사의의 [[장모]]가 신덕왕후의 [[언니]]이다. 즉 신덕왕후에게는 조카사위가 되는 셈이다.] 동북면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태종(조선)|태종 이방원]] 역시 그런 점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위험분자들을 마음놓고 [[함흥]]에 처박은 것이다. 이성계의 영지인 동북면, 그리고 이성계의 사병인 [[가별초]]는 태조 본인이 나서는 거 아니라면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이 뭐라고 선동하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난이 진압되자마자 대간에서는 대놓고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12002_003|동북면 가별치(가별초)가 난의 원인이었으니 혁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처벌받은 인원들을 보면 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승녕부 당상관인 정용수와 신효창이 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양가는데, 이들은 바로 '''태조를 [[함흥]]까지 호종한''' 인원들이었다. 애초에 승녕부 자체가 태상왕(이성계)의 수행을 담당하는 기관인데 이곳 인사들이 처벌받았다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또한 환관 함승복도 난에 가담했다 하여 처형되었는데, 그 역시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110019_007|태상왕의 수행 내관]]이었다. 전근대 [[왕조]] 시기에는 명분이 문제되거나 처벌했을 경우 미칠 파장 등이 우려되어 궁궐 내 [[왕족]]을 처벌하기 힘들 경우 그 수족 부하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대신하곤 했는데,[* [[성종(조선)|성종]]의 왕후였던 [[폐비 윤씨]]가 벌인 주술서 사건으로 휘하 나인들이 대신 처벌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모시는 상전을 중심으로 내관과 [[나인]]들이 일종의 계파를 형성하기도 했기에 이러한 처벌은 '부하에게 내려진 불명예는 곧 직속상전인 해당 인물의 불명예'라는 인식의 발전이었다. 또한 측근 심복을 [[숙청]]하여 계파 자체의 힘을 꺾고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어 그 인물에게도 간접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계급이 있고 상전을 위해선 경우에 따라 목숨까지 바친다곤 해도, 휘하 내관 및 나인들은 상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한다면 남은 동료들이 말만 겉으로 꺼내지 않을 뿐 분위기가 영 좋을리 없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태조의 수족들을 처벌한 것은 곧 태조가 이 사건의 흑막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난이 평정된지 17년이 지난 태종 18년에 다시 이 문제가 불거져 당시 태조의 수행내관이었던 안우세, 김수징 등을 문초하였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804027_001#footnote_1|안우세의 증언]]을 보면 김화에 도착했을 때 정용수와 신효창이 '''함승복과 배상충이 북쪽에서 군마를 뽑고 있다'''고 귀띔했다고 증언했고, 김수징은 조사의가 정용수와 신효창을 태조에게 참소했지만 태조가 물리쳤다고 하여 태조와 조사의의 상하관계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 이후 숙종대에 박순에게 시호 내리는 문제를 논하다가 갑자기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301007_003|함승복과 배상충을 태조가 보냈다]]는 언급이 나타나며 아예 성조(태조)가 조사의의 군중에 머물렀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무인정사로 순군옥에 갇혔던 조사의가 누구덕에 풀려나서 부사 벼슬까지 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이미 태종 원년에 태조가 한 번 안변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건 협력관계 따위가 아니라 그냥 대놓고 태조가 미리 사람들을 이리저리 배치해 타이밍을 잡고 대놓고 난을 일으킨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결국 조사의는 별로 한 것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방원 입장에서 자기가 [[1차 왕자의 난|후계자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몰아내고]] [[2차 왕자의 난|형을 숙청하더니]] 이제는 아버지와도 싸우고 처벌하는 패륜아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박포|하수인에 불과한 조사의를 희생양으로써 주동자로 몰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처벌 수위도 [[능지형]]이나 [[거열형]]도 아닌 고작 [[참수형]]이었다. 당대에 태종 본인이 [[청송 심씨]](심온 가문)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모반의 주범으로 몰린 [[강상인]]은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어졌고, 나중에 똑같이 난에 이름이 붙을 정도로 크게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나 [[이인좌]]가 빼박 대역모반죄로 걸려 거열형으로 죽은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편하게 죽여준 것이다. 국왕이 태상왕을 상대로 '''[[친정]](親征)'''을 한 유일무이한 사례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적당히 뭉갤 필요가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함흥차사]]의 일화와는 달리 태조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개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태조 이성계가 반란의 실질적인 주동자였고 적당히 뭉개긴 했지만 그래도 반란은 반란이었는지 영흥부는 영흥군으로, 안변대도호부는 안변현으로 강등당했다가 다음해에 다시 [[부(행정구역)|부]]로 복원되었다. 북방에서 중심이 되는 큰 고장이고 태조의 고향인만큼 장기간 격하시켜둘순 없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